가족을 폐지하라
🔖 국민국가라는 소우주가 그렇듯 가족은 국수주의와 경쟁의 산실이다. 가족은 마치 분사가 수억 개인 공장처럼 문화적 정체성과 민족 정체성과 이분법적인 젠더 정체성을 가진 "개인"을, 계급을, 인종 의식을 찍어낸다. 이는 무한히 재생 가능한 에너지원처럼 시장을 위해 공짜 노동을 수행한다. 앤 매클린톡Anne McClintodk은 <제국의 가죽Imperial Leather> 에 가족은 마치 "역사적 진보의 유기적인 요소"처럼, 일반적인 "배제와 위계를 합리화하는 데 반드시 필요해진 통합체 내부의 위계를 보여주는 이미지로서 제국주의를 위해 복무했다"고 쓴다. 이러한 모든 이유로 가족은 자본주의의 기본 단위로 기능한다. 마리오 미엘리Mario Mieli는 가족을 "사회적 조직의 세포" 라고 표현한다. 내가 다른 데서 한탄했듯이, 가족의 종말보다는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는 게 더 쉬울지 모른다. 하지만 꾸준히 이어진 유토피 아적인 실험들은 완전히 다른 사회적 조직의 실타래를 실제로 만들어내고 있다. 계급 없는 사회를 향한 운동이 가정을 자유롭게 형성하고 민주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는 전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경우 규모를 확장시켜 적용할 수 있는 소집단 문화microculture를 비롯해, 누구도 노동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음식과 쉴 곳, 돌봄을 박탈당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 같은 것들 말이다.
🔖 돌봄, 나눔, 사랑은 현재로서는 혈연관계 속에서만 추구하고, 의지하고, 기대하는 행위들이다. 이는 인위적이고 난해한 방식으로 불충분을 조장하는 비극으로 귀결되고, 유토피아에 대한 우리의 욕구를 거의 무용지물로 형해화시켰다. 린다 고든은 "아이들이 누군가 또는 누군가들에게 속하지 않은 사회를 상상하는 건 아주 아주 힘들다. 아이들을 국가의 재산으로 만드는 건 전혀 개선책이 되지 못할 것이다. 국가가 운영하는 대규모 어린이집도 그 대답이 아니다"라고 썼다. 우리에게 대답이 있는가? 자본주의적 축적 바깥에 놓인 관계가 어떤 모습인지 알기는 하는가? 루 코넘은 "만일 지금 그 대답이 없다면 내일까지 조금 강구해보자"고 말한다. 내일까지 조금 찾아보면서 동시에 케이시 윅스의 말처럼 "가족 폐지론이 요구하는 급진적인 구조 변화라는 긴 게임에 복무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우리가 지금과는 다른 미래를 실현하는 데 일조하는 행위자 중 하나라도 그 세상을 완전히 욕망하는 주체가 아닐 것이고, 어쩌면 그렇게 될 수 없으리라는 의미는 아닐지" 곰곰이 들여다보자. 우리가 지금 자녀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비옥"하거나 "일탈적인" 몸은 현재로서는 난폭할 정도로 퀴어 혐오가 심한 가족주의의 표준이자 전쟁터이며, 이 기나긴 변화의 중심에는 이들이 서야 한다.
롤라 올루페미는 디아스포라적인 흑인 혁명 페미니즘에 대한 찬가<만일을 상상하는 실험Experiments in Imagining Otherwise>에서 "핵가족은 아이들을 재산으로 탈바꿈한다"고 적는다. 이를 절박한 문제로 마음에 새겨두면서 롤라가 말한 "가족과 우리가 사는 건물, 먹는 음식, 우리가 받는 교육의 방향을 전환하고 이런 것들을 공짜로 만들어서 희생이나 후회나 생물학적 충동이나 젠더화된 소외가 불가능한 방식으로 아이를 양육할 가능성"의 문을 열자. 노파심에 덧붙이자면 특히 어린 사람들과 이들의 동반자가 지구상에 임의로 그어진 선을 넘도록 도움을 받는 게 아니라 서로 찢어져서 수천 명씩 수용하는 닭장 같은 곳에 들어가게 되는 "가족의 분리"에 대해서는 저항하는 게 좋다. 강제적인 가족 재결합도 항상 좋 을 수는 없고 경우에 따라 어떤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일 수도 있지만, 국경을 사이에 두고 생이별 시키는 기법들은 가족 제도의 심장과도 같다. 국경의 고문은 혈연관계를 짓밟고 심지어는 표적 삼는다. 국민국가의 인정을 받기만 하면 가족이라는 성역은 국가의 존중을 받는다는 환상에 부분적으로 일조하기 위해. 국경 수비대는 가족을 폐지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가족 제도의 주요 집행자들이다. 그러므로 가족 제도에 맞서는 싸움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 가령 "외부인”의 "합법적인" 가족을 찍어 누르고 있는 국가의 군홧발을 치우는 일이 될 수도 있고, 같은 가족에 있는 퀴어 꼬마에게, 그가 필요로 한다면 부모에게 맞서 연대의 손을 내미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해야 한다. 그러니까 국가가 특히 의지처가 필요한 사람들을 자기가 인정하는 몇 안 되는 돌봄제공자들의 품으로 돌려보내도록 만드는 동시에, 민간에 내맡겨진 돌봄에 반기를 들고, "부모의 권리"에 저항하고, 모든 사람이 다수의 돌봄을 받는 게 정상인 세상을 상상하기를 멈추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가족이 함께 지내기와 가족의 분리를 중단하는 것은 정치적 과제이자 자기 인종의 이익에만 머무르지 않는 모든 백인의 실천적 요구사항이지만 그게 우리의 지평은 아니다. 인간으로서 함께 지내기와 인간의 분리를 중단하는 것, 이것이 상상가능한 미래의 모습이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우리가 그것을 완전히 욕망하지 못하더라도 말이다.